근대화의 한 축으로서의 대기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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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te : 2016-07-31
Name : 문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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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는 70년대에 이르러 급속히 ‘기업사회’가 되기 시작했다. 수많은 공장들이 생기고 모두들 시골에서 도시로 진학을 위해, 또는 일자리를 찾아 올라오던 시절이었다. 고단한 삶이 기다리고는 있지만 뭔가 도시로 가서 공부도 하고 취직하면 더 나은 앞날이 기대되는 시절이었다. 피터 드러커가 이름 붙인 ‘기업사회’란 대기업이 사회의 주역이 된 사회를 말한다. 사회를 지탱하는 부를 기업이 창출하는 만큼 당연히 대기업은 사회의 주역이라 할만 하다. 동시에 사회에서 차지하는 영향력이 커진 만큼 대기업의 사회적 책임도 커져야 했다. 기업사회에서는 기업을 세우고 경영하는 능력이 있으면 자신의 기업을 창업할 수도 있지만, 설사 그런 능력이 없어도 큰 조직에 소속되어 자신의 발전을 얼마든지 구가하고 능력을 발휘할 수 있다. 기업에 소속되어 외국의 기술을 배우러 해외에 출장을 다니고, 기술 전수를 받는 사이에 사람들은 유능한 관리자와 경영자로 성장했다. 그 시절, 기업인들은 국가 발전에 기여한다는 자부심에 충만했다. 국가가 내 놓는 청사진에 따라 한국은 중소기업형이 아닌 대기업형의 산업국가가 되었다. 경제 성장의 위기로 다가 왔던 오일 쇼크는 월남전이 끝나고 철수한 인력과 장비를 이용해 중동 건설을 개척해서 극복했다. 구로공단에서는 앳된 소녀들이 여공으로 일했다. 서독 광부와 간호원으로 파견되어 일했고, 국내에서는 속속 들어서는 중화학, 조선, 전자 공단에서 외국의 기술을 배우며 일했다. 그 때 대한민국 사람들은 근대 국가를 만든다는 희망을 갖고 모두들 열심히 일했다.
그런데 1980 년대 말 어느 시점에서부터인가 ‘민주화’라는 이름 아래 이런 흐름에 브레이크가 걸리기 시작했다. 이 글에서 ‘민주화’ 운동의 공과를 평가할 수는 없다. 다만 한국의 근대화의 큰 흐름을 형성했던 ‘산업보국’의 흐름이 아쉽게도 그 때부터 꺾였음을 말하고자 한다. 민주화는 권위주의적 정치환경을 바꾸어 언론, 출판의 자유 등 개인의 기본권을 보장하자는 것일 텐데, 그 흐름 속에 한국의 옥동자인 기업가정신까지 내다 버리는 결과를 빚었다.
1988 년도 이래, ‘민주화’라는 거센 바람이 불며, 전국의 공단에서는 수 많은 사장과 공장장들이 노조운동으로 곤욕을 치러야 했다. 그 후 지금까지 30 년 가까이 한국 사회에서는 대기업이 사회의 적인 것처럼 인식되기 시작했다. 대기업이 하나라도 더 생기도록 해야 하는 마당에 한국은 1990년대 이래 대기업의 수가 지금까지 반으로 줄어 드는 역 주행을 하고 있다. 대기업을 옥죄는 규제, 거기에 더하여 회사가 살던 죽던 상관없이 지속적으로 근로자의 처우 개선만을 몰아 부치는 노조를 피해, 기업들은 새로운 투자 대신에 대거 공장을 해외로 이전했다.
이런 흐름을 보면서 우리 모두는 국가 근대화의 한 축인 경제적 자유를 증진하는 것의 중요성을 알아차려야 했다. 그럼에도 민주화를 내세우며 지난 세월 쌓아 올렸던 근대화의 흐름을 한 축을 해체하는 세월이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최근 ‘경제민주화’라는 이름으로, 기업하는 자유의 공간을 옥죄고 온갖 규제의 그물을 치는 입법이 계속되고 있는 것이 그 증거다. 이런 세월이 오래 계속되면서 대기업들은 모험을 기피하고 안주하려는 성향이 생겼다. 중소, 중견 기업들도 대기업으로 성장하기 보다는 정부의 지원제도에 안주하고, 성장을 위한 모험을 회피하는 성향이 생겼다. 더욱이 한국 근대화기의 1세대 창업자들이 세상을 떠나고 2세대, 3세대로 넘어 오면서, 창업일가의 기업지분이 낮아진 현상을 들어 그들의 경영권을 내 놓아야 하는 근거인 것처럼 여기는 풍조마저 가세했다. 사실 외부 투자를 통해 기업이 커지면서 지분 비율이 낮아지지만, 경영권을 인정하고 창업자가 구축해온 조직문화를 계승하게 해주는 것이야말로 자유주의 시장경제 고유의 인센티브 제도인 것이다.
기업인들이 사회적 책임을 완벽하게 잘 수행해 왔다고 말하려는 것은 아니다. 일부 ‘갑질’하는 행태로 사람들의 분노를 산 사례도 있고, 부적절한 회계처리로 회사에 손해를 끼치고 주주에 대한 책임을 이행 못한 사례도 많았다. 사회의 어느 곳에서나 문제아는 있는 것이고, 그런 사람에 대해서는 사안에 따라 법적인 처벌을 받게 하면 된다. 다만 이 글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서구의 역사를 보더라도 건전한 근대화는 정치적 자유로서의 민주화와 경제적 자유로서의 시장 자유주의 경제가 동시에 자라나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한국의 경우처럼 한쪽이 이상 비대해져서 경제적 자유를 위축시키면 안 된다는 점을 말하고 싶은 것이다.
어쨌거나 30여 년의 세월을 겪은 후 오늘날 한국사회에는 청년실업이니, 정규직•비정규직 문제 등 풀기 어려운 걱정이 많은 나라가 되었다. 앞으로 세계적인 경기가 하강국면에 돌입하면 문제는 더 심각해질 것이다. 이 문제들이 왜 생긴 것이냐 하면, 근본적으로 기업체 특히 대기업들이 나라의 경제성장을 견인하지 못했고, 늘어나는 취업자를 수용할 만큼의 새로운 투자를 하지 못했거나 안 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정부는 결코 일자리를 창출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기껏해야 공공근로와 같은 임시적인 일을 만들 수 있는데, 그런 일이 지속될 수는 없다. 대기업들이 산업의 성장 단계에 따라 제조업과 함께, 바이오 등 첨단분야, 그리고 서비스 분야 등 3차 산업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인 혁신과 투자를 해야만 양질의 일자리가 생긴다. 우리의 경우는 그런 동기부여가 되지 못했고, 그 결과 현재 한국 사회는 경제적 활력을 잃어가고 있다.
아무래도 한국의 경우 근대국가를 세우는 데 걸린 역사가 너무 짧아서, 국민들이 근대국가를 만드는 데 요구되는 ‘국부론의 기본’인 기업을 소중히 해야 한다는 개념이 없었던 것이 아닌가 싶다. 지금이라도 나라의 근대화를 완성하는 데 있어서 경제적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근본적인 성찰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민주화를 외치는 국회위원들은 아직도 기업을 규제하는 법규는 부족하다고 생각하고, 청년실업은 기업체에 신입채용을 강제 할당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그나마 겨우 버티고 있는 대기업들마저 글로벌 경쟁에서 모두 쇠퇴하게 만들고 싶은 것인지 걱정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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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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