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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근찬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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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
Date : 2016-07-24
Name : 문근찬
Hits : 2808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자유가 함께 존중되어야 한다는 근대의 정신을 좀 더 명확히 파악하기 위해서 영국의 근대화 역사를 살펴보자. 영국은 16세기말 스페인의 무적함대를 격파한 후 17세기에는 네덜란드와 겨루었으며, 18세기에는 프랑스와 겨루면서 해상강국이자 식민지 강국이 되어 갔다. 이런 성장의 주역이었던 부르주아지는 이에 대한 장려와 보호를 동시에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들 신흥 재산가들의 요구는 간단했다. 그 동안 나라의 번영을 위해 기여했으므로 국가 경영에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런 흐름이 청교도 혁명으로 이어졌다. 청교도들은 영국 국교회가 로마 카톨릭과 너무 가깝다는 데 불만을 갖고 있었다. 부르주아지는 절대주의에 반대하는 대중운동의 거점을 적절히 이용하면서 동시에 대중운동에 직면하여 여전히 강력한 지배계급인 구 귀족 사이에 신중한 타협을 할 줄 알았다. 하지만 그것은 어려운 타협이었다. 수평파라고 불리는 최빈곤층 소농들은 실질적 주권이 국왕이나 귀족이 아닌 인민의 손으로 선출된 하원에게 이양되어야 할 것과, 성인 남자의 보통선거권, 의석의 합리적인 재분배를 요구했다. 이렇게 의회를 중심으로 하는 정치적 자유주의를 요구하는 세력과 절대 왕정을 공고히 하려는 찰스 1세는 점차 양립할 수 없는 지경에 빠졌다. 유산계급이 중요하게 여기는 조세결정권을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찰스 1세는 1649년 불만에 찬 대대적인 인민운동 속에서 목이 잘려야 했다.

이렇게 영국의 신흥 부르주아지, 토지 귀족, 그리고 농민 계층은 정치적 자유를 쟁취해가고 있었다. 영국이 홉스(Hobbes)에 의해 전개된 절대주의 국가의 필요성을 옹호하는 이론을 논박하고, 자유, 자유로운 동의, 봉기할 권리를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를 정당화하는 데는 존 로크(John Locke)의 영향이 컸다. 로크의 사상은 곧 계몽적인 대 부르주아지의 사상이었으며, 그것은 당시 영국과 네덜란드의 지배계급에게, 그리고 다음 세기에는 프랑스의 법률가 및 철학자에게 계승되었다.
로크의 자유주의 정치사상을 전개하여 1691년에는 영국의 귀족이자 고위관리를 역임한 더디 노스(Dudey North, 1641 ~ 1691)경이 중상주의와는 전혀 다른 입장에서 무역론을 발표하였다. 그는 “무역의 관점에서 본다면 전 세계는 단일한 국가 또는 단일한 국민에 불과하며, 한 국가에 이익이 되고 다른 국가에 불이익이 되는 교역은 무역의 남용이다. 가격수준은 스스로 결정되어야 하며, 어떤 국민도 결코 국가의 간섭을 통해서 부유해지지는 않는다.”라고 적고 있다. 놀라운 우연의 일치가 일어났다. 같은 시기에 정치적 자유의 원칙(민주주의)이 발표되었으며, 중상주의를 벗어나 경제적 자유(경제적 자유주의 즉 자본주의)의 필요성이 인정되었던 것이다.
절대주의에 도전할 만큼 충분한 힘을 갖춘 부르주아지는 새로이 등장한 정부형태의 합법화를 필요로 했으며, 자유로운 거래 속에서 상업과 제조업의 새로운 발전을 가져다 줄 경제적 자유를 추구했다. 시장자본주의가 자유주의 국가에서 활발히 전개되는 것은 이런 역사적 흐름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절대왕정에서 중상주의를 해야 했던 것과 대조적으로 자유주의 국가는 경제적 자유가 허용되는 시장을 필요로 한다는 점이 점차 명백해졌다. 이렇듯 영국이 근대국가를 만들어 가면서 자연스럽게 깨달은 바는, 자유의 정신은 정치적 의미에서의 민주주의 제도와 경제적 자유의 보장을 동시에 요구하는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경제적 자유에 관해서는, 국가가 모든 것을 주도하던 중상주의보다 개인이 자유롭게 세계 시장을 상대로 사업을 하도록 보장하는 것이 이치에 맞는다는 깨달음은 실로 수백 년 세월의 경험을 겪고서야 알게 된 사실이었다.
영국의 역사에 비추어 우리나라의 근대화 과정을 대비해 봄으로써 어떤 시사점이 있는지 살펴보자. 우선 영국이 오랜 투쟁의 과정을 거쳐 이룩한 정치적 민주주의로서의 공화제, 그리고 경제적 자유주의를 우리는 1948년 건국과 함께 즉시 시작했다. 이를 위해 경제적으로 자립하고 국가 건설에 동참할 근대 시민이 필요하게 되었는데, 어쩌면 초대 이승만 대통령이 과거 지주의 토지를 소작농에게 아주 저렴한 대가로 분할함으로써 아쉬우나마 영국의 역사에서 볼 수 있는 근대국가 시민이 자라나게 할 수 있었고, 그 속에서 일부 기업가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나와서 기업을 일으키고 산업의 주역이 되면서 한국의 부르주아지층을 형성했다고 생각된다. 역사에서 보듯이 근대국가를 위해서는 부르주아지 계층도 필요하고 경제적으로 자립할 만한 자유로운 시민이 필요한데, 대한민국의 건국세력은 공산세력의 위협 속에서 그래도 이런 조건을 잘 만들어 냈던 것이다.
그 후 박정희 대통령은 고도성장 과정을 이끌면서 대한민국이 근대국가가 되도록 하는 경제적 틀을 확고히 했다. 기업이든 국가든 특별한 성장을 하는 데는 그 혁신과정을 조직하고 리드하는 리더십 시스템이 필요한데, 박정희 대통령은 대한민국을 마치 하나의 기업이라도 되는 것처럼, 적재적소의 인물 기용과 그에 대한 전폭적인 신뢰, 새마을이든 기업이든 반드시 성과에 기초한 국가자원의 지원 등 특유의 혁신 체제를 가동하여 기적적인 경제성장을 이루었다. 그 결과 파산 직전 상태였던 한국 경제를 불과 20년 동안에, 선진국들이 100년이나 200년 걸쳐서 이룩할 정도로 성장시켰던 것이다. 어느 정도의 국민경제 수준이 되어야 민주주의도 가능하다는 점에서 그 시절은 근대국가 한국을 만들어가는 과정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1990년대 이후 한국 국민들이 다소 오만해졌는지 그 동안의 성과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풍조가 생기기 시작함으로써 근대국가의 완성 단계에서 문제가 생겼던 것이다. 혹은 근대국가가 너무나 갑자기 얻어졌던 터라 그 귀중함을 미처 깨닫지 못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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