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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근찬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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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테뉴 - 경험주의와 합리주의
Date : 2016-12-14
Name : 문근찬
Hits : 3662

몽테뉴는 어려서부터 희랍 고전을 섭렵했다. 그렇게 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아버지의 특이한 교육이 한 몫을 했다. 몽테뉴의 아버지는 몽테뉴가 태어나고 얼마 안 되어 그를 이웃 마을에 사는 비천한 농가로 보내 키웠고, 두 살 정도 되었을 때 집에 돌아오게 한 다음부터는 라틴어로만 듣고 말하는 환경을 만들었다. 라틴어 전담 가정교사를 두었을 뿐만 아니라 집안의 가족들과 하인들도 몽테뉴 앞에서는 라틴어로만 말하도록 명령했다.


몽테뉴가 자신을 평범한 사람이라고 인식하는 동시에 자신은 아주 특별하고 다른 존재라고 생각하는 이중 감정은 이런 어린 시절과 관계가 있을지도 모른다. 후일 ‘에세’에서 몽테뉴는 그리스, 로마의 고전에 녹아 있는 지혜를 잘 소화하여 자신의 언어로 이야기를 풀어내고 있는데, 이는 그가 어려서부터 라틴어로 고전을 읽게 된 덕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어린 나이임에도 정규 교육과정보다는 고전을 읽는 데에 더 큰 재미를 느낀 몽테뉴의 문필가적 기질이 에세라는 거장의 기본 바탕임은 말할 필요도 없다.


몽테뉴가 어려서부터 에세를 집필할 때까지 틈틈이 읽은 책들은 그의 기억 속에 자리잡은 후 세월을 거치며 숙성되었다. 그는 독서를 하고 그 내용을 곧바로 사용한 것이 아니라 일단 잊어버리고 숙성시킨 것이다. 물론 독서한 내용을 모두 다 잊어버리라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독서를 통해 이전의 관념은 더 정교하고 복잡한 관념이 되고, 이를 적당한 주제를 서술할 때 다시 풀어내는 방식이다. 이는 경험론적 인식방법으로 해석된다. 백지상태였던 마음에 오랜 세월의 삶과 독서가 경험이 되어 축적되고 이렇게 쌓인 지식이 상호작용을 하여 한 차원 높은 지혜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이런 방식은 17세기 유럽 대륙의 이성주의 천재들의 생각과는 판이하게 대비된다. 예를 들어 유럽의 합리론자로서 데카르트(1596 ~ 1650)는 지혜가 아니라 지식을 추구하여, 육체와 별개의 실재로서 정신을 발견하고자 했다. 정신은 직관에 의해 최초의 진리를 획득하며, 그 후의 진리는 연역(일련의 추리)에 의해 획득된다. 지식은 이러한 두 개의 절차를 필요로 한다. 이런 사고의 체계를 확립한다는 목적을 가지고 데카르트는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정신)”는 제 1 원리에서 출발하여, ‘완전한 존재인 신’의 존재를 알게 되었고, 이어서 외부세계의 실존(물질)은 “신이 우리를 기만하지 않을 것이다”는 점에서 연역하여 그 존재를 결론지었다. 그리고 나서 신을 제외한 두 가지 실체인 정신과 물질로부터 철학과 과학이라는 별개의 영역을 추구하도록 하는 길을 열었다. 하지만 합리론은 인간 이성으로 끝 없는 진리를 구축할 수 있다는 오만을 낳았다.


몽테뉴가 살았던 지방은 그 이전에 영국의 지배 하에 있었다는 점에서 연유되었는지 모르지만, 몽테뉴의 철학적 지향은 후일 존 로크, 데이비드 흄 등에 의해 태동한 영국식 경험주의에 가까운 것 같다. 로크는 인간의 정신은 처음에는 ‘백지 상태(tabula rasa)’에서 시작하여 경험을 축적함으로써 이성과 지식을 쌓게 된다고 했다. 즉, 정신은 감각과 반성의 작용을 통해 관념을 만들고 이들 관념이 점차 복잡한 형태를 갖추게 되며, 지식이란 우리가 지니는 관념들의 일치 혹은 불일치에 대한 인식이다.


또 다른 경험론자인 흄에 의하면, 우리가 알 수 있는 유일한 것은 단지 인상 (impressions)과 관념(ideas)뿐이다. 우리는 외부 세계와 내적 자아의 존재를 믿지만 이러한 믿음에 어떤 논리적 정당성을 부여할 수 없다. 따라서 우리와 독립해서 존재하는 실재의 본성에 대한 탐구를 꾀하는 형이상학은 우리의 경험 능력 밖에 있으므로 불가능하다. 흄에 의하면 우리는 두 가지 종류의 지식을 소유할 수 있다. 첫째, 관념들의 관계에 의한 지식은 수학과 같은 지식이다. 둘째, 사태(事態)들에 관한 지식은 관찰에 의한 지식(경험적 사실)이다. 그런데 경험적 사실에 기초하는 추론은 전자의 영역에서 볼 수 있는 확실성을 지닐 수 없다. 이는 수많은 경험에 의해 인과관계를 주장한다 해도 확신할 수는 없다는 극단적 회의주의와 연결된다. 즉 ‘내일도 해가 뜰까?’ 식이 된다.


경험론자들은 실체, 정신 및 원인 등과 같은 개념들은 어떤 경험적 의미도 지니지 못한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물은 관념들의 연합일 뿐이고, 정신이나 자아는 지각의 다발이며, 인과적 관계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고 단지 일련의 느슨한 혹은 별개의 사건들만이 존재한다고 본다.


칸트는, “결과적으로 유럽의 이성주의 합리론은 독단론자의 통치 하에 전제적이었고, 서로 죽이는 내전을 통해 점차 완전한 무정부 상태에 떨어졌다. 그러자 그것이 어떤 형태든지 정착된 삶을 모조리 경멸하는 유목민들인 회의론자들(영국식 경험론자들)은 때때로 시민사회를 파괴했다. 다행히 그들은 그 수가 적었던 관계로 제국을 완전히 파괴할 수는 없었다.”고 했다. 그래서 칸트는 대륙 합리론과 영국 경험론에 의한 막다른 골목을 통합하려는 시도를 했다. 칸트는 경험과 관계 없이 우리의 이성으로 도달할 수 있는 한계가 어디인지, 지식의 근거를 재고하고 재구성하려는 시도를 다시 한 번 착수했다.


과학적 발견의 예를 보면 갈릴레오가 경사면을 굴러 내려오는 공을 단지 수동적으로 관찰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관찰과 함께 무엇이 일어나는가에 대한 이론(가설)을 생각하고 그 이론을 확실히 하거나 거부할 실험을 고안한다. 이는 우리에게 “이성은 자신의 계획에 따라서 이성이 산출하는 것만을 통찰한다.”는 것을 가르쳐준다. 결국 지식은 최초 경험에 의해 축적되지만 그것만은 아니고 이성에 의해 조합되면서 확장된다. 결국 칸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합리론과 경험론 둘 다 조화롭게 통합되어야 한다.”는 것이 아닐까?


몽테뉴는 1570년 낙마사고로 거의 죽을 뻔한 체험과, 절친했던 라 보에시의 죽음에서 온 충격을 겪은 후 공직생활에서 은퇴하고, 자유로운 정신으로 명상에 몰두할 수 있는 집필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한 줄기 강물이 흘러 내려 가듯 자신의 경험을 써 내려가는 방식으로 자신의 내적 세계를 세밀하게 관찰하는 새로운 형태의 문학적인 전통인 ‘에세’를 쓰기 시작한 것이다. 그의 글쓰기 방식은 고대 그리스 철학자 헤라클레이토스의 사상, “다원성과 통일성의 긴밀한 관계 – 세상의 모든 것은 끊임 없이 변한다. 그것을 관찰하는 ‘나’도 변한다.”는 사상에 주목했다. 이런 가운데 자신의 내면을 기술하자니 자연히 주의력을 집중해서 내면을 철저히 관찰해야 한다. 간혹 글 속에는 다양한 것들이 포함되고 서로 모순되거나 배치되는 주장이 혼재할 수도 있다. 하지만 몽테뉴는 굳이 그것을 고치거나 체계화하려고 시도하지 않았다. 억지로 체계화하려 했다면 몽테뉴는 합리론자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몽테뉴의 이런 글쓰기 방식은 후일 철학자 윌리엄 조이스(1842~1910)가 만들어낸 용어인 ‘의식의 흐름(stream of consciousness)’에 가깝다. 20세기의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 제임스 조이스, 윌리엄 포크너 같은 이들이 이 수법을 이용한 작품들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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