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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근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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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커의 ‘경제인’ – 양날의 칼
Date : 2016-12-03
Name : 문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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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인 개념’은 개인이나 개별 기업이 열심히 사적 이익을 추구하다 보면 사회가 성장하고 발전하게 돼 있다는 것으로, 현대 시장경제의 원리를 잘 대변하고 있다. 250여 년 전, 애덤 스미스는 ‘국부론’에서 각자 사익을 추구하는데도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공익에 기여하도록 자율적으로 조절이 된다는 ‘경제인의 개념’을 제시했는데, 이는 근대 자본주의 사상의 토대가 되었다.
 그러나 20세기 초 유럽 역사에서 보듯 경제인 개념은 만능이 아니었다. 이로써 산업혁명이 촉발되고 대형 기업체들이 생겨난 데까지는 고금에 없는 역사적 성과였지만, 그 변화의 속도가 빨라서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다. 일부 노동자들은 소외되었다고 느꼈다. 여기서 ‘소외’란 말은 노동자가 스스로 사회의 한 시민으로 생각되기보다는 하나의 부속품처럼 느껴지는 무기력한 상태를 말한다. 이런 상태는 20세기 초 찰리 채플린의 ‘모던 타임즈’라는 무성 영화에 잘 나타나 있다. 경제적 발전이 자동으로 자유와 평등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확인되자, 그 반작용으로 마르크스주의가 나왔다. 더불어 파시즘과 나치즘이라는 전체주의로 돌변해 혹독한 시련을 겪기도 했다.
반면에 미국의 산업혁명 과정에서는 프레더릭 테일러의 과학적 관리론으로 생산성 혁명을 일으키면서 노동자들이 급속하게 중산층에 편입될 수 있었고, 그 후 인간관계를 중시하는 관리론이 나오는 등 자본주의 체제가 스스로 진화함으로써 미국은 유럽에서와 같은 사회주의 혁명을 겪지 않을 수 있었다.
서구의 근대사에서 우리는 두 가지 교훈을 얻을 수 있다. ‘기능하는 사회’란, 첫째, 국가는 구성원이 나름의 몫을 할 수 있도록 경제적으로 기능해야 한다. 둘째, 정부, 대기업 등 사회의 핵심 기관들은 정당성을 가져야 한다는 요건으로 구성된다. 당시 유럽 사회는 전쟁과 대공황, 늘어나는 실업자 등 절망감에 쌓여 있었고, 첫째 요건이 결여된 결과 어느 순간에 파시즘이라는 주술에 걸려 순식간에 선거에 의해 나치 정부가 들어섰다. 그 후, 전체주의 권력이 경제 기능을 마음대로 재단하여 경제 회복을 추구했지만, 그들의 경제 시스템은 소유권은 껍데기로서만 존재하고 실제로는 국가에 의해 지배되는 상태였다. 이는 둘째 요건이 결여된 상태, 즉 정당성 없는 권력이므로 역시 ‘기능하는 사회’는 아니다.
반면에 당시 미국의 노동자들은 유럽에 비해 급여나 환경이 열악한 형편이었지만 성장하는 경제에 속했기 때문에 제도를 조금씩 개선해 나갈 수 있었다. 여기서 단순하게 판단한다면 일단 성장하는 경제에서는 사람들이 희망을 품고 문제를 해결할 여유가 생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제는, 성장이 정체되었을 때 국가와 그 구성원은 어떻게 대처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다. 아무튼, 그 대처 방식의 수준에 따라 선진국이 될 수도 있고 중진국에 머물거나 다시 쇠락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국사회는 유럽 사회가 겪었던 대규모 시민혁명이나 전체주의 혁명 같은 것을 겪지 않았지만, 지난 10여 년 ‘성장이냐, 분배냐’, ‘작은 정부냐, 큰 정부냐’, ‘시장경제냐, 규제냐’ 같은 양자택일을 강요하는 갈등은 지속되고 있다. 과거 유럽 나라들이 겪었던 전체주의 망령에 비하면, 이 정도 갈등은 큰 병을 막기 위한 예방접종 후의 미열과도 같다고 할 수도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 과제를 잘 해결하지 못하면 미열은 치명적인 병으로 발전될 수도 있다는 문제의식이 필요하다. 한 가지 원칙은, 이런 국면에서 자유주의적 경제의 자율성을 포기하면 다시는 성장할 수 없게 된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분출하는 평등의 욕구를 도외시 할 수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이런 국면에서 제일 요구되는 가치는, 자유주의 체제를 최대한 지키고자 하는 의지를 갖춰야 하고, 이것을 제한해야 할 때는 보수적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부작용이 최소화되는, 가능한 방안을 하나씩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날지 않으면 길을 잃는다.”라는 말이 있다. 걷도록 태어난 사람에게 난다는 것은, 요즘 유행하는 말로 차원을 달리 볼 줄 아는 ‘패러다임 전환’을 말한다. 현재의 자본주의 시스템의 한계를 극복하는 근본적인 가치의 변화를 생각해야 한다. 예컨대, 젊은이들이 제 몫을 하며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같은 일을 하면서도 비정규직이라서 받는 박탈감은 대기업의 기득권적인 노동조합에 의해 생겼다. 이런 부분을 해소하는 일에 우선순위가 주어져야 한다.
또한, 경제인의 원리를 뛰어넘는 새로운 패러다임은 ‘신중함의 윤리’를 요구한다. 예를 들어, 어느 기업이 단기 이익을 많이 냈다고 자랑을 하는 것도 신중하지 못한 것이다. 혹시 장차 성장을 위해 필요한 연구개발과 공급체인의 개선과 같은 일을 소홀히 한 결과 장부에 보여지는 이익이라면 그런 이익은 진정한 이익이 아니다. 또 사회의 리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급여를 천정부지로 올리면서 경기 하락을 내세워 구조조정을 강조한다면, 그런 리더가 경영하는 기관과 그 경영자는 정당성을 인정받지 못하게 된다. 이런 상태는 ‘기능하는 사회’를 해친다.
단지 경제인의 논리를 내세우면서, 자유주의 체제에서 개인 보상의 차등은 잘난 사람의 권리라고 할지 모르지만 사람들의 질투심은 발전의 촉매로도 작용하지만, 파괴 본능을 자극할 수도 있다. 역사에서 보건대, ‘경제인의 원리’라는 양날의 칼을 잘 다스리면 선진사회로 진입할 수 있고, 그러지 못할 때는 전체주의를 거쳐 몰락하는 사회로 가는 것을 보았다. 피터 드러커 박사가 60여 년 전에 저술한 ‘경제인의 종말’을 다시 음미할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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