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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근찬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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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원정, 정화 vs. 바스코 다 가마
Date : 2016-07-10
Name : 문근찬
Hits : 1399

근대국가를 여는 데는 기술과 과학의 급격한 발달이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기술의 발전도 고대세계를 거쳐 중세에 이르기까지는 아주 더딘 걸음이라 달팽이가 기어가는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산업혁명기를 거치면서 비로소 폭발전인 혁신이 일어났던 것이다. 우리 기억에도 산업화 초기 한국의 모습은 산에서 나무를 채취하여 밥을 해 먹는 농업 사회의 모습인데, 이 모습이 중세 조선시대의 모습과 그리 큰 차이가 없었던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이렇게 기술의 혁신이 폭발적으로 일어나게 한 요인은 무엇이었을까?  

 

기술의 측면에서 근대 정신의 면모를 보이기 시작한 중요한 사건으로서 포르투갈의 선장 바스코 다 가마의 원정(1498)이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 평가되고 있다. 이 사건을 즈음해서 동서양 기술력, 국력의 우위가 역전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서양은 르네상스가 막 무르익기 시작한 때여서 종교의 속박에서 풀려나려는 분위기 속에서 개인들이 무한한 가능성을 추구하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 교회의 힘은 막강해서 부르노와 같이 교리의 해석을 달리했다가 화형을 당하는 사람도 있었다.

 

당시는 이슬람 세력의 팽창으로 아시아로부터 향료와 같은 물품을 가져오는 것이 어렵게 된 상황을 타개하고자 유럽 사람들은 세계 곳곳의 항로를 개척하며 항해를 시작하던 때였다. 르네상스의 영향으로 봉건주의가 쇠퇴하면서 유럽 각 지방의 왕들은 자신의 왕국을 강하게 유지하기 위해 자치구에 속하는 도시들을 허용했으며, 그 속에서 활동하는 상인이나 은행가의 부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동시에 이들 상인과 은행가 같은 모험적인 사람들은 이런 분위기를 잘 이용하여 왕으로부터 귀족의 작위도 얻을 수 있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일종의 벤처 생태계 비슷한 것이 생겨난 것이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바스코 다 가마도 포르투갈 왕의 투자에 힘입어 4 척의 작은 배에 선원들을 태우고 인도 동쪽 칼리컷Calicut에 도착한 것이었다. 그는 약간의 향신료를 구한 후 귀국길에 올랐는데 인도를 갈 때는 순조로웠지만 아직 계절풍에 대한 지식이 없어서 포르투갈로 돌아오는 길은 무척이나 험난했다. 23일만에 건넜던 인도양을 맞바람 속에서 석 달이나 걸려서 건너오는 동안 지친 선원들은 영양실조 속에서 괴혈병이 돌아 리스본에 돌아왔을 때 살아남은 선원은 떠날 때의 1/3만인 55 명 뿐이었다. 비록 많은 희생을 치르고 별다른 성과 없이 돌아온 항해였지만 인도 항로를 개척했다는 데 포르투갈 왕은 감격해서 바스코 다 가마에게 귀족의 작위를 내리고 인도양의 제독이라는 칭호를 하사했다.

 

그런데 이 사건보다 수십 년이나 앞섰던 명나라 정화의 원정은 어떠했는지 살펴보자.  정화의 원정은 1405년부터 1433년 사이에 몇 차례에 걸쳐 일어났는데, 바스코 다 가마와는 달리 수백 척의 거함을 이끌고 인도의 같은 해역을 지나갔던 원정이었다. 첫 원정대는 60여 척의 초대형 선박을 포함하여 모두 300척이 넘는 배에 3만 명의 장병이 동원된 가공할 수준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원정은 뚜렷한 목적 없이 단지 왕의 과시욕을 만족시키기 위한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이어서 돌아갈 때는 기린, 얼룩말 같은 진귀한 동물들이나 수집해 갔을 뿐이었다. 명 나라 왕은 이런 대단한 항해능력과 군사력을 가지고도, 막상 북방의 유목민의 위협이 커지자 스스로 해금海禁 정책을 취한다면서 세계사의 무대에서 자진해서 퇴장해 버렸다. 반면에 서양에서 바스코 다 가마의 원정을 시작으로 대항해의 시대라는 지리적 발견과 식민지 개척의 시대를 열면서 유럽인들은 인도로 아시아로 계속 왔을 뿐 아니라 화약 무기를 앞세워 식민지를 건설했던 것이다. 베니스의 상인이라는 셰익스피어 원작의 영화에서 보듯이 동방으로의 항해를 위해 모험 투자가 활발히 일어나면서 사업 결과를 정확히 정리하기 위한 복식부기도 개발되었다.

 

위의 역사적 사건을 통해 근대의 정신에는 어떤 면이 있는가 짐작할 수 있다. 첫째, 모험을 무릅쓰고 무한한 가능성을 추구하는 자유로운 개인이 있어야 한다. 둘째, 이런 개인의 가능성을 북돋우는 사회 시스템의 니드가 있어야 한다. 위의 예에서는 왕과 모험가, 동양의 향료를 원하는 대중 등이 어우러진 벤처 생태계가 이런 니드를 반영한다.

반면에 명나라의 왕은 그냥 전제 군주일 뿐이었다. 당시 서양에는 자치 도시처럼 경제적 자치권을 갖는 개인이 생겨나기 시작했지만 동양에는 그런 것이 없었다. 물론 명나라에도 시장은 있었고 돈을 잘 버는 상인도 있었지만 이들의 부는 언제든지 전제 왕권에 의해 몰수될 가능성이 있었다. 위 두 가지 원정을 통해 근대를 여는 데 있어서 자유가 왜 중요한지 짐작하게 하는 사례라 할 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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